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호남 지역갈등 (문단 편집) ==== [[제13대 대선]]~[[제13대 총선]] ==== 영호남 지역갈등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 현재까지도 영향력이 남아있다. 정치 평론가들은 [[대한민국 제6공화국|87년 체제]]를 자주 현대 대한민국 정치를 설명할 때 사용한다. 1987년 체제의 기본은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제도와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는데, 이에 대권 유력 주자였던 3김과 1노는 각자의 셈법으로 공천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지역정당 체제를 그리며 합의하였다. 결국, 그 이전부터 지역구도가 87년 체제 이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에 1987년 체제가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양 김([[김대중]], [[김영삼]])이 당권[* 결국 [[공천]]권 문제다. DJ 측은 대통령이라는 자리 자체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당권을 DJ 측이 가져가도 무리는 아니라는 입장이었고, YS 측에서는 1971년 대선 당시 대선주자(김대중)에게 모든 힘이 실리지 않았던 것에 대해 한계를 느꼈다는 명분으로 당권까지 가져가고자 했다(DJ에게 계파 수장으로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당할 것을 요구). 두 사람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었던 게, 1. 2000년대 초반에도 대통령이 직접 인사-예산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력한 공직이 6,000석에 달했고, 관선 형태라 지자체 인선까지 관여했던 1987년에는 그보다 더하였다. 2. 1971년 대선 당시 헌신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도운 김영삼이 관찰자로써 나름 보고 느꼈던 일인만큼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것.] 문제를 놓고 후보 단일화 협상 최종 합의에 실패, 김대중이 탈당해 대선 직전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으로,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져서 이 때를 계기로 서로간의 갈등으로 격화되었다. 특히 김대중은 [[4자필승론]]이라는 지역주의에 근거하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김영삼 vs 김대중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갈등이 심해졌다. 결국 당시 대선에서 광주에서 김영삼보다 노태우의 표가 더 많이 나왔다고 한다. 결국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서로가 씻을수 없는 앙금을 이 대선에서 남기고 말았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TK([[대경권|대구/경북]])에 지역 기반을 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는 대구에서 70.7%, 경북에서 66.4%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PK([[부울경|부산/경남]])에 지역을 기반을 뒀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는 노태우 후보 득표율의 절반 수준에 해당하는 지지를 얻었으며 [[호남]]에 지역 기반을 뒀던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는 대구/경북 지역에서 3%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반대로 호남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 지지를 얻었는데 [[광주광역시|광주직할시]] 득표율이 무려 '''94.4%'''에 이르렀다. 이 당시 [[노태우]] 후보의 득표율은 4.8%,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은 0.5%에 불과했다. 전남과 전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서 [[김대중]] 후보가 각각 90.3%(전남), 83.5%(전북)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이같은 지지 성향은 대선 후 4개월 후에 치러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TK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정의당]]는 이 지역에서 29석 중 25석을 얻었으며, PK에 지역기반을 뒀던 [[통일민주당]](대표 [[김영삼]])은 이 지역에서 37석 중 23석을 얻었다. 반면에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평화민주당]](대표 [[김대중]])은 이 지역에서 37석 중 36석을 얻었다.[* 평민당이 얻지 못한 1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대중]]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이었다. 다만 이 당시 평민당 후보로 나섰던 [[한화갑]]의 후보 등록이 무효로 처리돼 [[한겨레민주당]] 소속 [[박형오]] 후보가 사실상 무혈 당선됐다. 그리고 훗날 박형오 의원도 평민당에 입당하게 된다.] 서울에서 평화민주당이 상대적으로 많은 의석을 차지한 것도 서울에 호남 출신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데 기인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